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문단 편집) ==== [[로마]] 공방전 (537년 - 538년) ==== 벨리사리우스는 자신의 5천 군대로 라벤나에 집결한 5만의 동고트 군대를 대적하기 어렵다고 여겨 진격을 멈추고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대한 보강에 치중하였다. 해자가 조성되었고, 하드리아누스 영묘(산타젤로 성)가 요새화 되었으며, 테베레 강에는 쇠사슬이 설치되었다. 537년 3월, 동고트 군대가 남하하였고, [[로마]]시 서북쪽의 살라리아누스 다리를 지키던 동로마 분견대는 요새화된 다리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벨리사리우스가 친위대를 이끌고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큰 손실을 입고 성 안으로 퇴각하였다. 동고트 수뇌부는 5만의 대군으로도 로마시를 완전히 포위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파악, 주요 문을 견제할 수 있는 7개의 진지를 세워 포위망을 구축하였다. 이 진지 6개는 테베레 강 동쪽의 시내 주요부에 설치되었고 남은 1개는 서안의 바티칸 인근에 세워졌다. 즉, 비티게스는 통행로를 통제하여 로마시의 시민과 군대를 말려죽일 셈이었다. 포위로 인해 [[로마 시민|로마시 시민]]들이 동요하는 것을 파악한 비티게스는 벨리사리우스에게 사절을 보내어 동로마 군대의 무사 귀환을 약속할 테니 항복을 종용하였다. 하지만 벨리사리우스는 '로마시의 진정한 주인인 로마 제국이 제대로 된 전투도 없이 도시를 너희 찬탈자들에게 내어줄 수 없다'고 답장하며 거절하였다. 이로써 포위 18일째가 되는 날부터 고트족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었다. 고트족은 공성탑을 앞세워 북쪽의 성벽을 공격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그들을 비웃으며 화살을 3번 당겼고, 세 명의 고트 병사들이 연이어 쓰러졌다. 이를 승리의 표식으로 여긴 동로마 수비대는 분발하여 사기를 높혔다. 공성탑을 끄는 소들이 노출된 것을 눈치챈 벨리사리우스는 궁수들에게 소들을 겨냥할 것을 명하였다. 이렇게 공성탑의 동력이 사라지자, 고트 군대는 제대로 된 공격도 못해본 채로 공성탑을 버리고 퇴각하였다. 이에 비티게스는 서쪽의 하드리아누스 영묘를 공격하며 동시에 방비가 허술한 동남쪽을 집중 공격하였다. 수비대는 대리석 석상을 네모나게 부수어 던지면서까지 필사적으로 방어해 내었고 결국 그들을 격퇴해 내었다. 서쪽 성벽에서는 고트족이 성벽을 뚫고 들어왔는데, 절묘한 시기에 벨리사리우스가 친위대를 이끌고 도착하여 그들을 다시 성 밖으로 밀어내었다. 비록 승리하였지만 큰 손실을 입은 벨리사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로 지원군을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었다.[* 사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지원 함대를 파견하였지만, 그들은 악천후로 그리스 남부에서 지연되고 있었다.] 한편, 포위의 장기화로 로마시 내부의 민심은 흉흉해지고 있었는데, 여기서 벨리사리우스는 교황 [[실베리오]]가 고트족과 내통하였다는 정황을 이유로 그를 폐위시키고 [[비질리오]]를 교황으로 옹립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성문의 자물쇠와 열쇠는 15일마다 교체되었고, 수문장도 돌아가며 맡게 하였으며 시민들을 감시하기 위한 순찰대도 조성되었다. 한편, 패배에 분노한 비티게스는 라벤나에 인질로 잡아놓았던 로마 원로원 의원들의 처형을 명하였으며, 로마시와 외항인 오스티아 사이의 도로와 다리를 장악하여 로마시의 식량 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로마시의 식량은 이제 강을 통해 오지 못하고 남쪽에 있는 항구인 안티움(현재 아니조)에서 하역된 후 육상으로 이송되어야 했다.] 그때까지도 15만의 인구를 자랑하던 로마시의 식량 상태가 악화되자 벨리사리우스는 비전투원인 노인과 여자, 어린이, 노예들을 포위망이 형성되지 않았던 남쪽 성문들을 통해 피신시켰다. 아피아 가도와 라티나 가도 등의 도로는 로마시 근교나 나폴리 일대로 피신하는 행렬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원정군의 상당수가 투입되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1600여 명의 슬라브 / 훈족 기병대로 구성된 지원군이 몰래 포위된 지 20일째인 로마에 입성하였다.(537년 4월) 기병전력이 동로마 군에 합류하게 되면서, 포위를 풀고 퇴각하는 고트족은 많은 희생자를 남겨야 했다. 일련의 승리로 기세가 오른 동로마 군대와 로마시 시민들은 성 밖으로의 진격을 주장하였다. 병력 차이를 인지하며 반대하던 벨리사리우스는 못이기는척 출정하였다. 벨리사리우스의 주력군은 북쪽 성문들을 통해 출정하였고, 발렌티누스의 소규모 기병대와 로마시 시민으로 구성된 민병대는 가장 큰 고트족 기지가 있는 서쪽으로 츨정하여 그들이 주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게 교란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서쪽의 네로 들판에서 발렌티누스 군대는 동고트 군대에 화살을 퍼부어 큰 피해를 입혔고, 고트족은 뒤의 언덕으로 철수하였다. 그러자 기세가 오른 민병대가 발렌티누스와 장교들의 제지에도 동고트 기지를 약탈하였고, 그 사이에 동고트 군대는 군세를 재정비하여 반격하였다. 많은 민병대가 희생되었고, 발렌티누스 본인도 겨우 성 안으로 후퇴하였다. 벨리사리우스가 훈련도가 미비한 민병대의 투입을 반대한 이유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한편, 벨리사리우스의 주력군은 고트족의 요새화된 기지를 공격하였는데, 의외로 강한 저항에 직면하였고, 동쪽의 고트족 기지에서 파견된 지원군이 동로마 군의 측면을 치자 벨리사리우스도 철수하였다. 비록 승리하였지만 고트족 진영도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고생하였으며, 따라서 휴전 협상에 나섰다. 비티게스는 동로마 측이 이미 장악한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양도할 테니 동로마 군이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벨리사리우스는 이탈리아 전체를 정복하는 것이 황제의 뜻이라며 거절하였다. 다만 의견의 대립에도 양측의 사정이 어려운 것은 피차일반이어서 3달간의 휴전이 합의되었다. 그동안 고트족 사절단은 협상을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파견되었고, 11월에는 3천 명의 이사우리아인과 2천 명의 그리스인으로 구성된 동로마 지원군이 대규모 식량과 함께 로마시에 입성하여 장기 농성에 대비하였다. 동고트 측은 사정이 악화되어 로마 - 오스티아 간 통행 통제권을 다시 동로마 측에 넘겨주어야했고, 537년 12월경에 이르면 오히려 동고트 측의 보급로가 로마 측에게 위협받을 지경이 되었다. 동고트 측은 이에 항의하였으나 벨리사리우스는 요한네스에게 2천 명의 분견대를 주어 그들의 후방을 유린케 하는 것으로 응수하였다. 그리고 동고트 족이 밤을 틈타 수도교를 통해 시내로 잠입하려 한 것이 들통나자, 벨리사리우스는 조약 위반임을 들어 휴전이 끝났음을 선언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파괴된 수도교를 통해 적이 잠입할 것을 우려하여 콘크리트로 구멍을 막아버렸다.[* 이로써 로마시의 목욕탕은 완전히 폐쇄되었으며, 로마시의 상수도 시스템은 20세기가 되어서야 부활하게 된다. 학자들은 이러한 인프라의 파괴 때문에 로마시가 이후로 중소 도시에 머물게 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이후 고트족이 베드로 성문을 공격하였으나 격퇴되었다. 또한, 동고트 측이 동로마 군인 중 두 명을 매수하려 하였으나 그중 한 명이 벨리사리우스에게 털어놓으며 실패하였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요한네스는 538년 봄에 반도 중부의 아펜니노 산맥 일대를 평정한 후 아드리아 해의 항구 도시인 [[안코나]]와 아르미니움([[리미니]])를 점령하였다. 리미니는 라벤나로부터 행군으로 하루 거리였고, 따라서 비티게스는 회군을 결심하였다.(538년 3월) 벨리사리우스는 그들을 천천히 추격하였고, 동고트 군이 [[역사는 반복된다|밀비오(밀비우스) 다리를 절반 가량 건너자]][* 이백 수십 년 전인 312년,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막센티우스]] 간의 [[로마 내전]] 중 유명한 전투도 같은 장소에서 일어났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 참조.] 후미를 공격하였다. 고트족은 곧바로 돌아서 맞섰으나, 동로마 군이 밀어붙이자 다리의 한정된 공간에서 뒤엉켜 강으로 떨어져 죽는 등 크나큰 손실을 입었다.[* 물론 칼에 맞아 전사한 이도 수두룩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